나는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 버스 타는 것을 좋아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하철을 타면 도심에 즐비한 간판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독 건물의 벽면을 어지러울 만큼 채우는 우리나라 간판들이 내겐 좋은 학습 도구가 된다. 세상은 간판으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고 애절한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또한 간판은 이 시대의 욕망과 트렌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강남역 거리를 걷다 보면 흘낏 보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카피 하나를 만난다. 바로 '예쁘면 DA야'라는 어느 성형외과의 카피이다. 아마도 많은 남자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할 생각할 것이다. 티는 못 내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는 똑같은 이유로 세상 모든 브랜드의 이름 읽기를 즐긴다. 'I hate monday'라는 이름의 양말을 보면 피곤에 찌든 어느 직장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마나 회사를 가기 싫었으면 양말 이름을 저렇게 지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응급실 떡볶이'라는 간판에선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 얼마나 공부 스트레스가 많으면 병원에 갈 정도로 매운 떡볶이 이름에 마음이 끌릴까 해서다. 그래서 '꿀빠는시간' 같은 유쾌한 이름에 끌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한 때 유행했던 '달고나 커피'는 우리들의 쓰디 쓴 하루를 보상받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총알 배송'을 보면 반갑기도 하면서 찜찜한 기분도 든다. 하루를 기다리지 못해서 밤새 택배를 날라야 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서다. 인간은 이렇듯 세상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붙인다.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우리는 화려한 이 시대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밀도'라는 식빵 전문점의 네이밍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의이름이다. 아주 속이 꽉 찬 한 덩어리의 갓 나온 식빵 하나가 선명히 떠올라서다. 여기서 밀은 영어의 Meal, 즉 식사를 의미한다. 이 브랜드의 로고 M자는 식빵 모양을 하고 있다. 게다가 딤채처럼 온도를 표시하는 기호가 M 자 뒤에 새겨져 있다. 온도와 습도까지 철저히 고려한다는 창업자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브랜드 컨설턴트로 일하는 나 역시 이런 시도를 여러 번 해보았다. 코로나로 인해 여러 사람을 부자로 만든 마스크에는 '청정일기'란 이름을 붙였다. 매일 일기를 쓰듯 마스크를 쓰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이름을 짓기 위해 '습관'이라는 이름을 한동안 달고 살았다. 척추관절 병원 이름은 한 글로 곧은 허리를 의미하는 '고든 병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장님이 쉬우면서도 격조 있는 이름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인진 몰라도 이 병원은 아주 일찍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가장 유레카를 외친 네이밍 작업은 따로 있었다. 어느 마케팅 테크 회사가 개발한 새로운 솔루션에 붙일 이름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이 솔루션은 '임신'이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연관된 모든 검색어를 마인드맵 처럼 한 화면에 보여준다. 사람들이 특정 단어를 검색할 때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지를 한 눈에 보여주는 아주 흥미로운 서비스였다. 나는 이 솔루션에 '허블'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허블은 대기권 밖에 설치하는 발상의 전환으로 우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 우주 망원경의 이름이다. 나는 이 서비스가 심연과도 같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다 속과 밀림, 우주를 탐험하는 온갖 것들 속에서 이 어울리는 이름을 찾았다. 그 결과가 바로 '허블'이었다. 담당자를 비롯, 임원과 사장님까지 모든 클라이언트들이 만족했던, 나름 성공적인 네이밍 작업이었다.
그러나 스몰 브랜드를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평범한 반찬 가게를 '도시곳간'으로 네이밍할 수 있는, 센스 있는 사장님들이 그리 많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다. 돈 나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텐데, 몇 백 몇 천을 써가며 네이밍을 하라고 권하기도 미안하다. 그러다 문득 '네이밍'이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조금 다른 얘기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사실 이름은 평범해도 된다. 고만고만한 매출을 일으키는 회사가 상표권 분쟁에 휘말릴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걸 고민할 정도라면 이미 성공한 브랜드가 되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네이밍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간판에 원조 하나를 단다고 뭐가 그리 달라질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중요한 건 평범한 이름을 뒤덮을 만큼 유명해지는 것이다. 하겐다즈와 발뮤다라는 이름은 아예 뜻이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그들이 유명해지면서 이 의미없는 이름들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네이밍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 너머에 있는 본질을 고민하자는 말이다.
이니스프리는 제주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오리온 초코파이에 정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은 광고의 힘이 크리라. 그러나 청정함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는 본질이 컨셉으로 연결되자 이들의 이름도 힘을 얻었다. 나는 닥터 자르트가 네이밍을 잘해서 유명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네스와 할리 데이비슨은 그저 사람 이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더마 코스메틱이라는 새로운 화장품의 장르를 열어제쳤고, 아일랜드의 흑맥주를 세상에 알렸으며, 자유를 갈망하는 미국 남성들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니 네이밍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지 말자. 그 대신 그 이름에 부여할 의미와 가치를 한 번 더 고민하자. 가장 나다운 가치를 컨셉으로 정리해 슬로건으로 선포해보자. 필요하다면 수시로 바꿔보자. 가장 어울리는 가치를 찾을 때까지. 내가 만일 최고의 맛을 낸다면 '개똥이'라는 이름도 유명해질지 누가 아는가.
물론 나는 내가 짓는 이름들에 정성을 다할 것이다. 의미와 가치는 물론 또렷한 컨셉을 잡는 일에 온 신경을 쏟을 것이다. 시간과 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단코 네이밍 작업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정말 좋은 제품을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서비스가 결국 그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오늘도 흔하디 흔한 마리헤어에서 이발을 한다. '앱스트랙'이란 어려운 이름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두향'이라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식당에서 칡냉면을 먹는다. 그리고 공사 현장을 지날 때마다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요철 주의'라는 이름을 만난다. 이 모두 다 내가 사랑하는 이름들이다. 평범하거나, 혹은 너무도 비범해서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소중한 이름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들이 내게 '좋은' 의미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그저 누군가가 부를 내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브랜드가 되고자 애를 쓰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네이밍 작업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