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요즘 교대역 8번 출구 근처에 있는 치과 병원을 컨설팅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이 치과는 핵심 가치가 '윤리의식'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윤리는 교과서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들은 '환자 중심의 사고'를 중시합니다. 예를 들어 의사 입장에서는 최고의 진료를 위해 치아를 제거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환자는 그러길 원치 않죠. 이때 의사는 판단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진료를 설득할지, 아니면 환자의 판단을 중시해야 할지 말이죠. 이 병원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고집스럽게 최고를 추구하기보다 환자와의 소통을 더 중시 여긴 거죠.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윤리의식'입니다.
윤리의 사전적인 의미는 우리가 말하는 품성, 습관이나 관습을 말합니다. 윤리학은 인간의 행위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와 규범을 연구하는 학문이죠.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의 관계를 규정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품성이나 관습을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치과 병원이 의미하는 윤리의식이 더욱 확연해집니다. 이 병원은 환자를 대하는 진정성 있는 태도로 치과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흔한 후기 마케팅 한 번 하지 않고 소위 영혼을 갈아넣는 각오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병원을 컨설팅하면서 가장 크게 배우고 있는 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문득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이 생각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블루보틀'은 클라리넷 연주자인 제임스 프리먼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20년 넘게 오케스트라 교향악단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한 제임스 프리먼은 음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습니다. 음악에 열정과 흥미를 잃어가던 그가 빠진 건 바로 ‘커피’였죠. 제임스 프리먼은 결국 2002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한 레스토랑 창고에서 직접 커피 로스팅을 시작했습니다. 로스팅한 지 48시간 이내의 원두 30g을 94도의 물로 내려 정성스럽게 한잔씩 추출했죠. 커피 한잔을 내리는 데 10분이 넘게 걸리지만 최고의 커피를 맛보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블루보틀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업의 본질’에 충실했기 때문니다. 블루보틀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핵심은 ‘최고의 커피’를 제공하는 있습니다. 로스팅 48시간 이내, 원두 30g, 94도의 물은 블루보틀의 ‘완벽주의’를 상징하죠.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철학과 가치를 블루보틀의 전 직원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블루보틀에서 커피를 내리는 직원은 모두 바리스타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직원이 직무와 관계없이 푸어 오버(pour over, 블루보틀의 커피를 내리는 방식) 교육을 받습니다.
무려 8만 5459개, 국내 커피전문점을 모두 합한 숫자입니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합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도 커피전문점은 1년 새 1만개 이상 증가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타벅스는 국내에만 1600여개, 전세계적으로 3만여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죠. 하지만 블루보틀은 미국와 한국을 포함 4개국에 진출했지만 점포 수는 110여개에 불과합니다. 한국에선 서울과 제주를 포함 겨우 11개의 매장만 운영하고 있죠. 이른바 ‘느림의 미학’ 때문입니다. 블루보틀은 커피를 내리는 그 시간 동안 손님들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죠. 그러나 국내의 커피전문점을 포함한 숙박, 음식점업의 평균 준비기간은 7개월 남짓에 불과합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쉽게 창업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쉽게 문을 닫는 것도 현실입니다. 이 모두가 철학의 부재 때문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병원의 이름은 '내인생 치과'입니다. 치과 치료에 불신으로 가득한 한국 시장에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병원을 운영한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편법을 고민하지 않고 환자와의 소통이라는 치료의 본질을 이해하는 이 병원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블루보틀처럼 말이죠. 그래야 더 많은 병원이 치료의 본질을 고민할 수 있게 되겠죠. 그래서 이 병원이 가진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핵심이 바로 '에필로그 북'입니다. 이 병원은 그동안 치료를 무사히 마친 환자들에게 선물을 증정해왔습니다. 저는 이 선물에 이 병원의 스토리와 추구하는 가치, 환자들의 후기를 잠은 책 한 권을 추가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병원에서 받은 치료가 왜 가치있는지를 스스로 확신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 알릴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블루보틀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건 물론 위험한 시도입니다. 블루보틀처럼 잘 된 사례를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죠. 하지만 업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가 차별화된 브랜딩을 가능케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인생치과와 블루보틀은 환자와 손님과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최고의 치료와 최고의 커피를 제공하기 위해 그들은 느리지만 올바른 관계를 선택했습니다. 여기서 올바름이란 자신의 생각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커피와 치과 진료도 그 자체로 탁월함을 추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손님과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이것이 이 시대의 브랜드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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