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세상 '무가치한' 경험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정확히 6년 3개월 동안 다닌 회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장은 제가 뽑은 직원을 제 상사로 앉혔습니다. 그리고 저는 퇴사를 했습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안은 채 석 달 동안 동네에 있는 도서관에서 수백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 저를 사장은 다시 회사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무실에 앉혀 놓고 편하게 일하라 했습니다. 저는 그게 참 고마웠었는데... 저의 무가치함은 결국 회사를 나와 홀로 일하면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사장은 제가 정말 안쓰러워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미안함과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상쇄하려고 그랬을까요... 뭐,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무가치하지 않은' 사람이니까요.
며칠 전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라는 드라마를 봤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찌질하고 못나고 무가치한 줄 알았던 사람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봤습니다. 2화에 이렇게 이야기를 쏟아내면 나머지 화를 어떻게 풀어가려는지 도무지 감도 오지 않습니다(현재 5화까지 방영). 하지만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알겠습니다. 세상 폼나보이는 인간들도 다 하나씩은 그림자 이상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 못나보이는 인간들 안에서 가치 있는 사랑과 파워가 용솟음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그게 바로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인간애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20년 간 영화 한 편 찍지 못한 감독 지망생입니다. 모두가 업수이 여기는 시나리오를 씁니다. 하지만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건 화려한 성공의 삶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참 원대한 포부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성공한 사람들은 다 그 '불안'을 끌어안고 살거든요. 앞서 이야기한 사장은 직원들 앞에서 항상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번 배신할 사람, 두 번 배신할 사람, 그리고 계속 배신할 사람... 대략 이런 뉘앙스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사람은 업계에서 나름 인정받는, 스스로 천재가 아닐까 의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 사람을 조금은 '불쌍한' 중년의 남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회사 다니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과급을 받았습니다. 저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다시 나왔다는 이유로 절반도 안 되는 돈을 받았습니다. 그건 괜찮았습니다. 굳이 그 사실을 직원들 앞에서 까놓고 이야기하지만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돈으로 회사 대표 와이프를 위한 외국 화장품을 하나 샀습니다. SK II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제가 밤늦게 그에게 선물을 하자 끌어안고 고맙다 하더군요. 아무도 그에게 그런 선물을 주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유일한 저도 그렇게 '감사'의 선물은 아니었다는 걸 그도 잘 몰랐을 겁니다. 어쩌면 오늘 황동만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저만의 훈계를 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 대표는 자신보다 직원의 이름이 더 알려질까 봐 바이라인도 쓰지 못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성장 배경에 얼마나 큰 아픔이 있을지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런 사람들이 주로 '성공'의 스토리를 쓴다는 겁니다. 그래서 또 많은 사람들이 그 어두운 과거가 밝혀져 하룻밤의 유명세를 견디지 못하고 쓸쓸히 기억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성공'을 꿈꿉니다. 그게 얼마나 큰 불안과 절망이 켜켜이 쌓인 무가치한 것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세상 모든 사람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것들 가운데 진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그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 씌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울과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꼭 이 드라마를 곱씹어 보셨으면 합니다. 드라마 속 황동만은 세상의 언어로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이 정말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는 건 단 2화만 보고도 알겠더군요. 1화에서 주인공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뭔데 내 인생을 평가하냐고. 그렇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과거의 사람을 불러와서 참 미안하지만, 그때의 저도 꼭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니 꼭 붙어서 배어야겠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제 빛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뭐라 말하건, 타인이 뭐라 말하건... 어쩌면 당신의 우울은 그런 올곧지 않은 잣대로 인해 만들어진 허상일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건 하나 여쭤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황동만은 자기 자신과 섹스를 하고 싶을 만큼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해도 나 자신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그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한둘 정도는 곁에 두고, 없다면 찾아봅시다. 황동만에게는 그런 친구가 있었고, 그런 형이 있었고, 그런 연인이 생길 가능성이 아주 높아졌다는 게 기쁩니다. 이 외침이 어느 좌절한 누군가의 귀에 가 닿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참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게.... |